바로크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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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로크 회화는 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미술 양식으로,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종교화가 변화하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각 국가별로 특색 있는 양식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카라치의 아카데미즘이 두 축을 이루었고, 플랑드르에서는 루벤스를 중심으로 화려하고 감각적인 바로크가 나타났다. 네덜란드에서는 렘브란트, 베르메르 등을 중심으로 세속적인 장르가 발달했으며, 프랑스는 푸생과 로랭의 고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무리요 등이 활약했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비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하인리히 뵐플린의 연구를 통해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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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회화는 15세기에서 17세기 플랑드르 지방의 미술 사조로, 세밀한 묘사, 풍부한 색채, 종교 및 세속적 주제를 다루었으며 얀 반 에이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 같은 화가들의 혁신적인 기법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 발전에 기여했다. - 바로크 회화 - 네덜란드 황금시대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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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크 회화 | |
|---|---|
| 미술 운동 | |
| 시기 | 1590년경 - 1750년경 |
| 관련 운동 | 르네상스 매너리즘 로코코 |
| 특징 | |
| 특징 | 과장된 움직임과 명확하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디테일을 사용하여 극적인 효과, 긴장감, 웅장함을 만들어냄 |
| 기법 |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
| 주제 | 종교적, 역사적 알레고리 |
| 주요 예술가 | |
| 이탈리아 | 카라바조 안니발레 카라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잔 로렌초 베르니니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과르디 주세페 크레스피 |
| 플랑드르 | 피터르 파울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 야코프 요르단스 |
| 네덜란드 공화국 | 렘브란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프란스 할스 헤라르트 반 혼토르스트 |
| 스페인 |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호세 데 리베라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
| 프랑스 |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조르주 드 라 투르 형제 르냉 |
| 기타 | 마티아스 브라운 프란츠 안톤 마울베르치 페터 얀 브란들 |
| 영향 받은 미술 운동 | |
| 영향 받은 미술 운동 | 로코코, 신고전주의 |
2. 역사
바로크 미술은 16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교회 내부의 개혁 요구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고, 회화 예술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을 했다. 이후 몰라누스(Molanus) 등 성직자들은 교회 회화(painting)와 조각(sculpture)가 매너리즘(Mannerism)의 기교 없이 대상을 명확하고 강력하며 점잖게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1]
많은 미술사가들은 Caravaggio)와 카라치 형제가 이러한 교회 미술의 기능에 대한 대중적인 개념으로의 회귀를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모두 1600년경 로마에서 활동하며 작품 의뢰 경쟁을 벌였으나, 카라바조는 작품의 점잖지 못함으로 인해 비판받았다.[21]
종교화, 역사화, 풍유화, 초상화는 여전히 중요한 주제였지만, 풍경화(Landscape art), 정물화, 풍속화도 가톨릭 국가에서 점차 일반화되었다.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를 선두로 지중해 국가들과 독일, 중앙 유럽의 신성 로마 제국 대부분이 바로크 양식을 채택하였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에서는 북부 사실주의 전통에서 상당히 다른 예술이 발전했다. 종교화와 역사화가 매우 적었고, 대신 정물화, 일상 생활 장르화, 풍경화와 같은 세속 장르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렘브란트의 예술에서 바로크적 성격은 분명하지만, 페르메이르와 다른 많은 네덜란드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한 분류가 덜 사용된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예술은 인접한 플랑드르 바로크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바로크 작품의 전형적인 이상화와 화려함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다. 플랑드르 바로크 회화는 네덜란드의 경향에 일부 참여하면서도 전통적인 범주를 더욱 분명한 바로크 양식으로 계속 생산했다.
프랑스에서는 품위 있고 우아한 고전주의가 바로크 회화에 독특한 풍미를 더했는데, 17세기 후반은 회화의 황금기로 여겨진다. 가장 중요한 두 예술가인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은 로마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으며, 그들의 작품은 거의 모두 이젤화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후원자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았다.
2. 1. 이탈리아
16세기 마니에리스모의 지적 편중에 대한 반발로,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카라치의 아카데미즘이 등장했다.[21]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종교화는 단순, 명확하고 격렬한 감정 표현을 담게 되었고, 궁정 장식화는 르네상스 이래의 고전 신화를 바탕으로 화려함과 권세를 표현했다.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1545~1563)에서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회 내부의 개혁 요구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고, 회화 예술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을 했다. 이후 몰라누스(Molanus) 등 성직자들은 교회 회화(painting)와 조각(sculpture)가 매너리즘(Mannerism)의 기교 없이 대상을 명확하고 강력하며 점잖게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1]
많은 미술사가들은 Caravaggio)와 카라치 형제가 이러한 교회 미술의 기능에 대한 대중적인 개념으로의 회귀를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모두 1600년경 로마에서 활동하며 작품 의뢰 경쟁을 벌였으나, 카라바조는 작품의 점잖지 못함으로 인해 비판받았다.[21]
종교화, 역사화, 풍유화, 초상화는 여전히 중요한 주제였지만, 풍경화(Landscape art), 정물화, 풍속화도 가톨릭 국가에서 점차 일반화되었다.
주요 화가는 다음과 같다.
| 화가 | 출생-사망 |
|---|---|
| 로도비코 카라치 | 1555년 - 1619년 |
| 아고스티노 카라치 | 1557년 - 1602년 |
| 안니발레 카라치 | 1560년 - 1609년 |
|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 1563년 - 1639년 |
| 카라바조 | 1571년 - 1610년 |
| 구이도 레니 | 1575년 - 1642년 |
| 구에르치노 | 1591년 - 1666년 |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 1593년 - 1652년경 |
|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 1596년 - 1669년 |
| 살바토레 로사 | 1615년 - 1673년 |
| 안드레아 포초 | 1642년 - 1709년 |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 1696년 - 1770년 |
2. 2. 플랑드르
17세기 초 네덜란드가 독립한 이후, 플랑드르는 에스파냐의 속령으로 남아 궁정과 교회가 지배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루벤스는 대규모 화면에 호화롭고 감각적인 세계를 격동적으로 표현하는 바로크 양식에 적합한 화가였다. 루벤스의 등장은 마니에리슴이 지배적이던 이전 플랑드르 화단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이후의 방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 다이크는 루벤스와 견줄 만한 화가였지만, 그 역시 루벤스의 아틀리에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루벤스의 양식을 계승한 요르단스는 플랑드르의 세속적인 생활을 그렸고, 풍경화가 프랑스 스나이델스, 정물화가 얀 브뤼헐 등도 루벤스의 아틀리에에서 성장했다. 루벤스의 영향권 밖에 있던 주목할 만한 작가로는 아드리앙 브라우웰이 있는데, 그는 작은 화면 속에 농민 생활의 어두운 측면을 그려냈다.
| 화가 | 출생-사망 | 주요 작품 |
|---|---|---|
| 얀 브뤼헐(장남) | 1568년 - 1625년 | 『꽃다발』(1606년) |
| 페테르 파울 루벤스 | 1577년 - 1640년 | |
| 프랑스 스나이더스 | 1579년 - 1657년 | |
| 야코프 요르단스 | 1593년 - 1678년 | |
| 안토니 반 다이크 | 1599년 - 1641년 | |
| 다비드 테니어스(자) | 1610년 - 1691년 |
2. 3. 네덜란드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서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는 회화 예술을 간접적으로 다루었고, 이는 몰라누스(Molanus)와 같은 성직자들에 의해 해석되어 교회 미술이 매너리즘(Mannerism)의 기교 없이 대상을 명확하고 강력하게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종교화, 역사화 등이 여전히 중요한 주제였지만, 풍경화(Landscape art), 정물화, 풍속화는 가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주요 장르로 발전했다.[1]
네덜란드의 주요 화가는 다음과 같다.
| 화가 | 출생-사망 |
|---|---|
| 프란스 할스(Frans Hals) | 1580년 - 1666년 |
|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 1606년 - 1669년 |
| 얀 슈테인(Jan Steen) | 1626년 - 1679년 |
| 야코프 판 로이스달(Jacob van Ruisdael) | 1628년 - 1682년 |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 1632년 - 1675년 |

2. 4. 프랑스
품위 있고 우아한 고전주의가 바로크 회화에 독특한 풍미를 더했다. 푸생과 로랭은 로마에서 활동하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었다.
- 장 드 보그랑 (Jean de Beaugrand, 1584년 - 1640년)
- 조르주 드 라 투르(1593년 - 1652년)
- 니콜라 푸생(1594년 - 1665년)
- 르냉 삼형제 (Le Nain)
- * 앙투안 르냉 (Antoine Le Nain, 1599년경 - 1648년)
- * 루이 르냉 (Louis Le Nain, 1593년경 - 1648년)
- * 마튀 르냉 (Mathieu Le Nain, 1607년 - 1677년)
- 클로드 로랭(1600년 - 1682년)
- 이아상트 리고(1659년 - 1743년)
2. 5. 스페인

- 프란시스코 리발타 (1565년 - 1628년)
- 호세 데 리베라 (1591년 - 1652년)
-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1598년 - 1664년)
- 디에고 벨라스케스 (1599년 - 1660년)
- 알론소 카뇨 (1601년 - 1667년)
-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1617년 - 1682년)
- 후안 데 발데스 레알 (1622년 - 1690년)
3. 국가별 바로크 화가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화가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종교, 역사, 신화, 풍경, 정물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바로크 양식의 특징인 역동성, 화려함, 극적인 표현을 추구했다.
- '''네덜란드'''
-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판 레인(1606–1669)
- 헨드릭 아베르캄프(1585–1634)
- 게라르트 테르 보르흐(1617–1681)
- 아드리아엔 브로이어(1605–1638)
- 헨드릭 테르 브뤼헌(1588-1629)
- 알베르트 쿠이프(1620–1691)
- 게릿 도우(1613–1675)
- 얀 반 고이엔(1596–1656)
- 프란스 할스(1580–1666)
- 마인데르트 호베마(1638–1709)
- 게라르트 판 혼토르스트(1592–1656)
- 피터르 더 호흐(1629–1684)
- 빌럼 칼프(1619–1693)
- 피터르 판 라에르(1599–1642)
- 유딧 레이스터(1609–1660)
- 가브리엘 메츠(1629–1667)
- 아드리아엔 판 오스타데(1610–1685)
- 야코프 이삭스존 판 루이스다엘(1628–1682)
- 살로몬 판 루이스다엘(1602–1670)
- 피터르 얀스존 사엔레담(1597–1665)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
- 얀 스테인(1626–1679)
- '''보헤미아'''
- 바츨라프 홀라르(1607–1677)
- 카렐 슈크레타(1610–1674)
- 페트르 브란들(1668–1735)
- 벤젤 로렌츠 라이너(1686–1743)
- '''플랑드르'''
- 피터 폴 루벤스 (1577–1640)
- 안토니 반 다이크 (1599–1641)
- 야코프 요르단스 (1593–1678)
- 얀 브뤼헐(장로) (1568–1625)
- 프란스 프랑켄(자) (1581–1642)
- 클라라 페터스 (1594–1657)
- 제라르트 세허스 (1591–1651)
- 프란스 스나이더스 (1579–1657)
- 다비드 테니어스(자) (1610–1691)
- 아드리아엔 반 우트레흐트 (1599–1652)
- 코르넬리스 더 포스 (1584–1651)
- '''프랑스'''
- 발렌탱 드 불로뉴(1591–1632)
- 필리프 드 샹파뉴(1602–1674)
- 로랑 드 라 이르(1606–1656)
- 조르주 드 라 투르(1593–1652)
- 샤를르 르 브룅(1619–1690)
- 르냉 형제:
- 앙투안 르냉(c. 1599–1648)
- 루이 르냉(c. 1593–1648)
- 마티외 르냉(1607–1677)
- 외스타슈 르 쇠르(1617–1655)
- 클로드 로랭(1600–1682)
- 피에르 미냐르(1612–1695)
- 이아상트 리고(1659–1743)
- 니콜라 푸생(1594–1665)
- 시몽 뷔에(1590–1649)
- 앙투안 와토(1684–1721)
- 프랑수아 부셰(1703–1770)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
- '''독일'''
- 코스마스 다미안 아삼(1686–1739)
- 볼프강 하임바흐(1605-1678)
- 아담 엘샤이머(1578–1610)
- 요한 리스(1590–1627)
- 제바스티안 스토스코프(1597–1657)
- 아담 마뇨키(1673–1757)
- '''이탈리아'''
- 페데리코 바로치(1535–1612)
- 자코포 키멘티(1554–1640)
- 조반니 바티스타 파지(1554–1627)
- 안토니오 템페스타(1555–1630)
- 바르톨로메오 체시(1556–1629)
- 알레산드로 마간차(1556–1640)
- 베르나르도 카스텔로(1557–1629)
- 로도비코 치골리(1559–1613)
- 에네아 탈피노(1559–1626)
- 바르톨로메오 카르두치(1560–1610)
- 카라바조(1571–1610)
- 게르치노(1591–1666)
- 안니발레 카라치(1560–1609)
- 귀도 레니(1575–1642)
- 주세페 파세리(1654-1714)
- 오라치오 젠틸레스키(1563–1639)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2– c. 1656)
- 도메니키노(1581–1641)
- 아고스티노 카라치(1557–1602)
- 루도비코 카라치(1555–1619)
- 베르나르도 스트로치(1581-1644)
-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1596–1669)
- 조반나 가르조니(1600-1670)
- 버지니아 베치(1601-1638)
- 그레고리오 프레티(1603–1672)
- 프란체스코 코자(1605–1682)
- 마티아 프레티(1613–1699)
- 살바토르 로사(1615–1673)
- 루카 조르다노(1634-1705)
- 엘리사베타 시라니(1638-1665)
- 안드레아 포초(1642–1709)
- '''폴란드'''
- 얀 레이스너(1655–1713)
- 예르지 시에미기노프스키 엘레우테르(1660–1711)
- 시몬 체호비치(1689–1775)
- 바르트워미에이 스트로벨(1591–1650)
- 크시슈토프 보구셰프스키(1635)
- '''포르투갈'''
- 호세파 드 오비두스(1630–1684)
- '''스페인'''
- 호세 안톨리네스 (1635–1675)
- 알론소 카노 (1601–1667)
- 후안 카레뇨 데 미란다 (1614–1685)
- 클라우디오 코엘로 (1642–1693)
- 후안 반 데르 하멘 (1596–1631)
-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 (1569–1649)
-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 (1612–1667)
-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1617–1682)
- 안토니오 데 페레다 (1611–1678)
- 로렌초 키로스 (1717–1789)
- 프란시스코 파체코 (1564–1644)
- 프란시스코 리발타 (1565–1628)
- 호세 데 리베라 (Lo Spagnoletto) (1591–1652)
- 후안 데 발데스 레알 (1622–1690)
- 디에고 벨라스케스 (1599–1660)
- 토마스 예페스 (1595 또는 1600–1674)
- 프란시스코 수르바란 (1598–1664)
- '''영국'''
- 윌리엄 돕슨(1611–1646)
- 조지 제임슨(1587–1644)
- 고드프리 니러(1646–1723)
- 피터 렐리(1618–1680)
- 다니엘 미이텐스(1590–1648)
- 존 마이클 라이트(1617–1694)
3. 1. 이탈리아
16세기의 마니에리슴은 지적인 편중으로 복잡한 우의(寓意)를 즐겨 사용하며 귀족과 일부 지식계급의 주목을 끌었으나, 17세기의 이탈리아 회화는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카라치의 아카데미즘을 두 축으로 하여 출발하였다. 이들은 마니에리슴 회화와 달리 현실성과 감각성을 추구하였다.종교화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의문스러운 전설이나 출처 불명의 주제를 배제하고, 마리아 숭배, 성 베드로 숭배, 새로운 성인(聖人)이나 순교자 숭배 등을 즐겨 묘사하였다. 주제는 단순·명확해지고, 격렬한 감정 표현을 그리기도 했다. 묘사법상으로는 세부까지 균등하게 그리지 않고, 주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세부를 생략하기도 하였다. 비종교화, 특히 궁전 장식화 등은 르네상스 이래의 고전 신화를 제재로 사용하였으나, 강한 현실감을 넣어 왕후(王侯)들의 권세를 표현하였다.
르네상스 이래로 고전 고대 그리스 로마, 특히 로마 미술을 미의 이상으로 삼아,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도 자연으로부터 아름다운 형체를 선택하여 이상미를 창출하는 것이 교양 있는 화가의 역할이라고 여겨졌다. 볼로냐파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론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노골적인 사실보다는 이상미에 치우치는 화가도 적지 않았다. 이 시대의 고전주의가 이에 해당하며, 이상미는 틀에 박힌 것이 되기 쉬워 아카데미즘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회 내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제기한 내부 개혁에 대한 많은 질문들에 답했으며, 그 결정문에서 회화 예술을 간접적으로 다루었다. 이는 이후 몰라누스(Molanus)와 같은 성직자 저술가들에 의해 해석되었는데, 그들은 교회 환경의 회화와 조각이 그 대상을 명확하고 강력하게, 그리고 매너리즘의 화려한 기교 없이 점잖게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미술의 기능에 대한 대중주의적인 개념으로의 회귀는 많은 미술사가들에 의해 카라바조와 카라치 형제의 혁신을 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모두 1600년경 로마에서 활동하며 수주 경쟁을 벌였으며, 카라치 형제와는 달리 카라바조는 작품의 점잖지 못함으로 비판받았다.[1]
그러나 성화, 역사화, 풍유화, 초상화가 여전히 가장 고귀한 주제로 여겨졌지만,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는 가톨릭 국가에서도 더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는 주요 장르였다.[1]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를 선두로 지중해 국가들이, 그리고 독일과 중앙 유럽의 신성 로마 제국 대부분이 뒤이어 바로크 양식을 본격적으로 채택하였다.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 로도비코 카라치 (1555년 - 1619년)
- 아고스티노 카라치 (1557년 - 1602년)
- 안니발레 카라치 (1560년 - 1609년)
-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1563년 - 1639년)
- 카라바조 (1571년 - 1610년)
- 구이도 레니 (1575년 - 1642년)
- 구에르치노 (1591년 - 1666년)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593년 - 1652년경)
-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1596년 - 1669년)
- 살바토레 로사 (1615년 - 1673년)
- 안드레아 포초 (1642년 - 1709년)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696년 - 1770년)
3. 2. 플랑드르
17세기 초 네덜란드가 독립한 이후, 플랑드르 회화는 네덜란드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플랑드르는 여전히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으며 궁정과 교회가 큰 권력을 쥐고 있었고, 이는 루벤스로 대표되는 바로크 양식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루벤스는 큰 캔버스에 화려하고 감각적인 세계를 역동적으로 표현했으며, 마니에리슴이 지배하던 플랑드르 화단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루벤스와 견줄 만한 화가로는 반 다이크가 있으며, 그 역시 루벤스의 작업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는 플랑드르의 세속적인 생활을 그린 요르단스, 풍경화가 프랑스 스나이더스, 정물화가 얀 브뤼헐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루벤스의 작업실에서 성장했다. 루벤스의 영향에서 벗어난 주목할 만한 작가로는 농민 생활의 어두운 면을 작은 그림에 담아낸 아드리앙 브라우웰이 있다.[1]
| 화가 | 출생-사망 | 주요 작품 및 특징 |
|---|---|---|
| 루벤스 | 1577년 - 1640년 | 바로크 양식, 화려하고 감각적인 표현 |
| 반 다이크 | 1599년 - 1641년 | 루벤스의 제자, 초상화에 뛰어남 |
| 요르단스 | 1593년 - 1678년 | 루벤스의 제자, 플랑드르 세속 생활 묘사 |
| 프랑스 스나이더스 | 1579년 - 1657년 | 루벤스의 제자, 풍경화가 |
| 얀 브뤼헐 | 1568년 - 1625년 | 루벤스의 제자, 정물화가 |
3. 3. 네덜란드
- 프란스 할스 (1580년 - 1666년)
- 렘브란트 판 레인 (1606년 - 1669년)
- 얀 슈테인 (1626년 - 1679년)
- 야코프 판 로이스달 (1628년 - 1682년)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32년 - 1675년)
3. 4. 프랑스
조르주 드 라 투르는 촛불이 켜진 장면을 전문으로 그렸는데,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어둡고 극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며 고전적인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르냉 삼형제는 주로 풍속화를 그렸고, 이아상트 리고는 주목할 만한 초상화가였다.| 이름 | 출생년도 | 사망년도 | 비고 |
|---|---|---|---|
| 장 드 보그랑 | 1584년 | 1640년 | |
| 조르주 드 라 투르 | 1593년 | 1652년 |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음 |
| 니콜라 푸생 | 1594년 | 1665년 | 이탈리아에서 주로 활동 |
| 앙투안 르냉 | 1599년경 | 1648년 | 르냉 삼형제 중 한 명 |
| 루이 르냉 | 1593년경 | 1648년 | 르냉 삼형제 중 한 명 |
| 클로드 로랭 | 1600년 | 1682년 | 이탈리아에서 주로 활동 |
| 마튀 르냉 | 1607년 | 1677년 | 르냉 삼형제 중 한 명 |
| 이아상트 리고 | 1659년 | 1743년 |
3. 5. 스페인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서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교회 내부에 남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제기한 내부 개혁에 대한 많은 질문들에 답했으며, 그 결정문에서 짧고 다소 간접적인 구절로 회화 예술을 다루었다.[1] 이는 이후 몰라누스(Molanus)와 같은 여러 성직자 저술가들에 의해 해석되고 상세히 설명되었는데, 그들은 교회 환경의 회화(painting)와 조각(sculpture)가 그 대상을 명확하고 강력하게, 그리고 매너리즘(Mannerism)의 화려한 기교 없이 점잖게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교회 미술의 기능에 대한 대중적인 개념으로의 회귀는 많은 미술사가들에 의해 Caravaggio)와 카라치 형제의 혁신을 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1] 그들은 모두 1600년경 로마에서 활동(하고 수주 경쟁을 벌였)으며, 카라치 형제와는 달리 카라바조는 끊임없이 작품의 점잖지 못함으로 비판받았다.[1]
그러나 종교화, 역사화, 풍유화, 그리고 초상화가 여전히 가장 고귀한 주제로 여겨졌지만, 풍경화(Landscape art), 정물화, 그리고 풍속화는 가톨릭 국가에서도 더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는 주요 장르였다.[1]
| 화가 | 출생년도 | 사망년도 |
|---|---|---|
| 프란시스코 리발타 | 1565년 | 1628년 |
| 호세 데 리베라 | 1591년 | 1652년 |
|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 1598년 | 1664년 |
| 디에고 벨라스케스 | 1599년 | 1660년 |
| 알론소 카뇨 | 1601년 | 1667년 |
|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 1617년 | 1682년 |
| 후안 데 발데스 레알 | 1622년 | 1690년 |
3. 6. 영국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1545~1563)에서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회 내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제기한 내부 개혁에 대한 많은 질문들에 답했으며, 그 결정문에서 짧고 다소 간접적인 구절로 회화 예술을 다루었다. 이는 이후 몰라누스(Molanus)와 같은 여러 성직자 저술가들에 의해 해석되고 상세히 설명되었는데, 그들은 교회 환경의 회화(painting)와 조각(sculpture)가 그 대상을 명확하고 강력하게, 그리고 매너리즘(Mannerism)의 화려한 기교 없이 점잖게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교회 미술의 기능에 대한 대중적인 개념으로의 회귀는 많은 미술사가들에 의해 Caravaggio)와 카라치 형제의 혁신을 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모두 1600년경 로마에서 활동(하고 수주 경쟁을 벌였)했으며, 카라치 형제와는 달리 카라바조는 끊임없이 작품의 점잖지 못함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종교화, 역사화, 풍유화, 그리고 초상화가 여전히 가장 고귀한 주제로 여겨졌지만, 풍경화(Landscape art), 정물화, 그리고 풍속화는 가톨릭 국가에서도 더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는 주요 장르였다.
- 호세파 드 오비두스(Josefa de Óbidos) (1630–1684)
3. 7. 체코(보헤미아)
- 바츨라프 홀라르(en:Václav Hollar) (1607년 ~ 1677년)
- 카렐 슈크레타(en:Karel Škréta) (1610년 ~ 1674년)
- 페트르 브란들(en:Petr Brandl) (1668년 ~ 1735년)
- 벤첼 로렌츠 라이너(en:Wenzel Lorenz Reiner) (1686년 ~ 1743년)
3. 8. 포르투갈

- 조제파 드 오비두스(Josefa de Óbidos)(1630년 ~ 1684년)
4. 용어
"바로크"라는 용어는 원래 그 과장된 강조를 비판하기 위해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10] 다른 견해로는, 논리학의 스콜라 철학에서 복잡한 삼단논법의 한 형태를 나타내는 "바로코(Baroco)"라는 기억술 용어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10] 특히 이 용어는 르네상스 미술의 명료하고 절제된 합리성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기이하고 과다한 세부 묘사의 과잉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스위스 출신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은 그의 저서 《르네상스와 바로크》(1888)에서 처음으로 바로크를 재평가했다. 뵐플린은 바로크를 "질량에 도입된 운동"으로 규정하며 르네상스 미술과 대조되는 미술로 파악했다. 그는 현대 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마니에리슴과 바로크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18세기까지 지속된 후기 아카데믹 바로크 양식도 무시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학자들은 뵐플린의 영향으로 독일 학계가 탁월해진 후에야 바로크를 존중받는 연구 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5.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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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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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example, in French calling Poussin Baroque would be generally rej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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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 profile, including variant spellings of the artist's name
http://www.getty.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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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Lives of the Painters was published in Rome, 1672. Poussin's other contemporary biographer was André Félib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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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What is Baro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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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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